로드-콘 브레이크(Rod-cone break)_홍성화_2020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있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이내 서서히 물 체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듯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동했을 때 빛에 대한 시세포의 민감 도가 달라지는 현상을 로드-콘 브레이크(Rod-cone break)라고 한다.
우리의 눈은 추상체(cone cell)와 간상체(rod cell)이라는 두 시세포를 통해 빛에 의한 자극을 받아들인 다. 빛에 민감한 추상체는 망막 중심부에 위치해 색을 구분하는 반면, 간상체는 망막 주변부에 위치하며 어두운 곳에서 주로 명암을 식별하는 역할을 한다. 중심부와 주변부에 위치한 두 시세포는 서로 교차하 며 우리가 조응(調應)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야경이라는 이름으로 불이 밝혀져 있고, 조도에 따라 해가 저물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 가로등이 꺼지고 밝혀지기를 반복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어둠을 낯 설어하고 그런 조응의 순간을 잃고 있는 것 같다.
빛의 포화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 차현욱에게 먹이란 어둠의 풍광을 실어 나르기 위한 더 직접적 인 매질이라 할 수 있다. 이 어둠 속에선 명확해 보였던 경계가 흐려지고, 선명했던 질감이 뭉개지며, 이 때 형상은 시각적으로 완전히는 구분될 수 없다. 형상은 다만 희박한 빛에 의해 이지러진 어둠으로 드러 난다. 무한대에 대한 나눗셈의 결과가 역시나 무한대인 것처럼, 어둠은 분절된다 해도 결국 하나의 어둠 이라는 듯. 차현욱의 필묵법이 전통적 수묵산수의 그것과 표면상 긴밀하면서도 전혀 다른 무엇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차현욱은 처음으로 채색된 그림들을 선보인다. 채색된 풍경과 형상들은 그가 지금껏 먹으로 표현해온 어둠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림자밟기>는 <끝없는 밤>과 같은 화도(畵圖)를 공유하 지만, 여러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끝없는 밤>에서 수묵으로 표현했을 때 더 섬세했던 부분들이 뭉뚱 그려지기도 하고, 비워져 있던 부분이 <그림자밟기>에서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는 먹과 안 채(顔彩)라는 재료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데서 기인했을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응시와 조응의 어떤 확장된 차원에서 작가가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를 준비하며 차현욱은 스스로가 상상한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 다. 모두가 밝은 곳에서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걸어가는 개. 밝은 곳의 존재들은 개를 어둠 밖으로 꺼내기 위해 회유하지만, 정작 개가 선택한 그 어둠 속에 무 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어둠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나머지 어둠을 주시하는 방법 은 잊은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흐릿하고 불분명할지라도 어둠 속에서만, 또 어둠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불을 끄고 잠시 빛이 나는 모든 것들을 멀리 둔 후 눈을 크게 떠보자. 중심부의 시세포가 주변부로 역할을 넘겨주는 그 순간에 보일 것들을 상상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