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남아) 있는 것들—버드나무, 산, 그리고 사람도_2023
콘노 유키
단순히 이해하면 여기에 없다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심지어 한때 있었던 것이 이제 없어졌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없어진 것, 그것은 내 머릿속이나 마음속에는 있지만, 이곳 외에는—바깥에는 없다. 그렇다면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기에는 흐름과 변화가 있다. 움직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여기에 없는 것을 에워싼다. 지금 느끼는 부재란 텅 비어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가 남는 곳이다. 이곳을 허망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는 과거를, 기억을 붙잡는 대신 지금의 흐름과 변화에 맡기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적응하기의 방법이다. 하지만 내가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왔을 때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 흐름에 몸을 도저히 맡기기 힘들고 충돌에 휘말려 자신을—나 자신을,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을 잃는다. 나와 바깥의 시차(時差/視差)에서 후자가 더 우세하고 혼자 남아 있게 될 때, 사람은 지금에도 여기에도 없는 감각을 느낀다. 그럼에도 사람은 텅 비어 있음에 지지받아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에 없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남는 것이 바깥의 흐름과 변화에서 내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 준다. 텅 비어 있게 된 공백에 지탱되어, 나 또한 있게 된다. 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 없어졌을 때, 바깥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있게 되는 것은 내 안에 남은—텅 비어 있지만, 그럼에도 남은 것이다.
차현욱이 그리는 풍경은 자세히 보면 하얀 굴곡과 그 주변의 다채로움으로 구성된다. 갈필로 겹겹이 쌓인 다채로운 색은 하얀 선이나 점으로 남은 것 사방으로 풍경을 증식해 나간다. 작가 본인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자리한 버드나무, 돌, 산, 동물, 하늘—이 모든 것들이 작가가 눌러 남긴 공백에서 출발하여 평면에 그려진다. 한지에 하얀 선으로 남은 굴곡은 그 표면보다 살짝 깊은 위치에 있다. 이 굴곡 위에서, 공백은 작가의 손동작으로 선이 지나가고 오가고 교차하는 한가운데에 남는다. 여기의 없음과 바깥의 흐름은 차현욱의 작품에서 관계가 역전한다. 요컨대 있던 것이 없어진 공백, 텅 비어 남은 자리는 나를 중심으로 주변을 재구성하게 된다. 바깥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은 그의 작업에서 공백이라는 부재를 역으로 중심 삼아 사방에 다채로움으로 그려진다. 구름이 있고, 산이 있고, 인간이 있다. 작가의 심상을 눌러 담은 하얀 선과 점은 이미지로써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힘으로 퍼져 나간다. 작가 본인이 현재까지 경험해 온 이사와 이주, 그 삶의 흐름과 변화는 그의 회화 작업에서 시차에 근거한 부재, 즉 괴리감에 의한 상실감에 빨려 들어가지도 바깥의 변화나 흐름에 동화하지도 않는다. 그와 달리 작품은 지금 여기에 남은 공백을 중심 삼아=중심으로 여러 심상을 그려나간다.
한지에 남은 공백의 선은 마치 산을 흘러가는 물줄기와도 같다. 작가라는 수맥에서 출발하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가 파편적인 형상이 피어오르는 것은 중력과 시간의 경과에 의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작품은 중력과 시간의 경과에 굴복하기만 하지 않는다. 앞서 역전된다는 표현으로 말했던 것처럼, 작가가 그려나가는 풍경은 중력과 시간의 경과를 거슬러(=맞서) 올라간다. 차현욱이 그려나가는 풍경이 작가라는 한 사람의 여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중력과 시간을 감지한 뒤, 여기에 없는 것=공백에 지나간 그때 그곳을 그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이전을 알게 되며, 지금이 어느새 과거로 물러서면서 우리는 그때 그곳을 떠올린다. 색이 칠해지지 않은 곳은 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는) 여기에 작가의 삶과 그 속에서 여전히 남는 것이 있을 때, 공백은 허무함 대신 중심으로 자리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변화를 일궈 간다.
이미지를 눌러 담아, 하얀 공백이 선과 점으로 남는다. 차현욱의 작품에서 선은 다름을 표시하는 것이자 다름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그의 회화에서 피어오르는 색채와 이미지는 과거에 작가가 보낸 경험과 기억의 집합으로 자리한다. 이 집합에 보는 사람은 작가의 경험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탄생하고 하나 더 늘어나는 이미지를 미루어 본다—더 많은 기억과 추억이 언젠가 오는 미래에 피어오를 것임을 알고 기다리면서. 여기에 없는 것은 작품이라는 지금 여기에 언젠가는 있었고 또 언젠가는 있을 것으로 자리한다. 흐름과 변화가 바깥에 있다면 이 안에서 머무는 자리가—비록 지금은 없을/없어졌을지라도—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다채로운 심상에 작가가 담은 마음은 그 흐름과 변화를 궤적 삼아 작가 스스로 간직하는 태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