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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라는 언어로 산수화 읽기_강선학(미술평론)_2015

 먹으로 가득 찬 화면이 차현욱을 만난 첫 인상이다. 그리고 산수화 같다는 인상이 없지 않지만 전통적인 화법이나 소재를 목격하기 힘들다는 인상이 뒤따른다. 찬찬히 들여다본 후에야 비로소 여기저기 소재들과 먹을 다루는 기법들에서 전통적인 여러 흔적들을 목격하게 된다. 몇 군데 옛 그림을 차용하거나 학습한 흔적도 없지 않다. 화면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산악구조로 보아내는 북송(北宋) 범관(范寬)의 계산행려도(谿山行旅圖)를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앙시하게 만드는 구성이나 화면 하부에 아주 적게 배치한 물의 조감적인 포치는 전통적인 옛 그림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 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가 공들이는화면은 사물을 묘사하거나 재현하려는 유혹을 벗어나려한다. "언어는 사물 자체를 표현하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발화로 자리매김 한다"1)고 한다. 재현하지 않는 묘사는 규정적인 개념의 언어에 가깝기보다 사물이 가진 다양한 잠재성을 건드리는 애매모호함에 가깝다.

그 애매모호함 탓일까, 그의 작업은 읽기 미끄럽다.

 

 그의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먹색을 따라가 보면 선으로 보기에는 면이고 면으로 읽어내기에는 흔적으로 넘치는 먹흔들을 만난다. 그렇다고 먹흔의 집적으로 보기에는 형상성이 강하다. 산수를 연상하는 암괴의 표현들은 집적이라 부를 만한 먹의 적묵 상태를 보여주지만 적묵에 의한 구축은 아니다. 개칠한 것은 분명하지만 적묵으로 보기에는 평면적이고 밀도도 그에 이르지 못한다.

 산수화라면 적어도 앙시나 부감, 평원법으로서 읽어낼 만한 구성이 보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산악의 봉우리나 화면 아래 부분의 물가의 인상도 실은 최소한의 암시일 뿐이거나 이해의 기미를 제공하는 것이지 산수로 읽혀지는 환유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산수화 이해는 실경을 통해 이해하기 보다는 산수를 언어로 습득하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산수라는 공간이 아니라 관념적인 유추로서 산수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데 근접해 있다.

 

 그의 미완성의 작업들을 살피다 보면 산수를 그리다 어느새 산수는 뭉개지고 먹흔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미지들은 어느새 물러나고 먹흔들이 운동으로 그곳에 서성거린다. 하나의 몰타주로서 산수화를 구성하기보다 형태를 해체하는 것으로, 형태의 구성을 머뭇거리며 연기시키는 그런 형용의 먹흔들이다. 형상에서 비형상으로 전통에서 탈 전통으로, 평면에서 구체적 묘사로 먹에서 검은색으로 선에서 일탈하는 면으로의 반전으로 이어지는 인상도 여기에 연유한다. 그의 먹흔들 혹은 먹색, 먹을 구성하는 선조들은 형상을 구성하는 묘사가 아니라 형상을 배제하고 그것을 일정정도 견제함으로써 해체의 진전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해체적이기보다는 잠재적인 힘으로 남겨둔 상태이다. 화면의 하단 가장자리를 하얗게 남겨두고 드문드문 먹흔들을 배치하고 있지만 바위나 개울가를 묘사하기 위한 포치라고 보기 힘들다. 그런 연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저 물이 있고, 하늘이 있는, 흰색의 여백을 구조화할 뿐이다. 그런 구조는 한편으로 서양화의 전면화와의 변별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상단과 하단의 흰 여백이 없다면 그것은 전면화의 속성을 보이는 추상화의 하나로 읽히기 안성맞춤이며 먹흔이라는 방법 역시 추상표현주의 기법의 원용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러한 특징들이 현대와 전통의 지점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이거나 이해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리어 전통의 일정부분을 자신의 미학적 입장이나 작업과정의 입의(立意)와 장법(章法)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현대화를 지향하면서도 전통적인 구성력을 단번에 털어내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일부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콜라주 된 바탕의 요철은 먹과 선, 운동을 차단하고 새로운 움직임을 준비하는 잠재로서 작용한다. 종이가 가진 흡수력은 선과 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덧붙여진 중이들의 요철과 이음새는 이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예상 밖의 순간에 저지하고 견제하고 어색하게 한다. 조화가 아니라 불화를 생성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재현불가능한 것은 바로 여기에, 즉 어떤 체험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말해지는 것의 불가능성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그의 작업을 두고 전통산수화의 해체라고 지적한 이유이다.

 그것은 묘사와 재현을 벗어나는 방법이며 작가의 개입을 어느 순간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화면 위에서 우연성이 주도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운동, 시간, 흔적으로 분절된 흔적들의 집적 혹은 병렬은 화면을 구성이 아니라 평면화 시키며 시간의 해체에 시선을 주게 한다. 시간에 의해 구축된 형상들이 아니라 평면화된 운동으로 구체적인 산수풍경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화면의 여백과 구상적 성격이 현실과의 유일한 관련지대가 된다. 이런 특징은 묘사와 재현 사이에서, 해체와 운동으로, 혹은 새로운 먹 풍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먹 자체의 운동으로, 행위로서 산수로, 구체적 산수에서 추상화의 표면으로, 전통적 관념에서 현대화의 표면효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의 이런 시선의 유도는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해체된 흔적들로 이끈다. 전체적인 인상이 산 혹은 물이라는 일반적 인상에 형상을 기탁하지만 어떤 산 어떤 물이라는 구체적인 묘사가 거기 없다는 점에서 개념적인 이해나 제시에 가깝다. 산이라는 언어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관념적 소지가 다분하고 한편으로 관념산수의 면모를 엿보게 되기도 한다. 먹흔으로 이루어진 이합집산의 형상이 전면화를 이루지만 관념적인 산수화의 이해와 닿아 있다는 유추도 그런 맥락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런 특징들이 실은 익숙한 기법이자 풍경이라는 점이다. 한국화의 현대화라는 지향 아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이미 시도된 형상들이고 그런 맥락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율로서 먹이라는 재료의 특성이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의 먹이 전통적 의미의 작업이라면 먹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먹을 하나의 자료로 삼아서 전통으로 전통을 해체하는 내파의 방법이라면 해체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콜라주나 몽타주의 채용 이유도 분명해야 할 것이다. 산수화의 새로운 이해로서 콜라주나 몽타주가 아니라 풍경을 해체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보다 정교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해체의 목적이 풍경이 아니고 먹이라면 의식의 분절과 결합, 혹은 해석, 산수화 해독하기로서 먹 작업을 새롭게 묻는 적극성이 절실하다.

 “언어는 사유를 복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해체되었다가 사유에 의해 다시 결합될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치 발자국이 몸의 움직임과 노력을 반영하듯, 언어는 사유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기성 언어의 경험적 활용과 창조적 사용은 구별해야 한다. 경험적 활용은 창조적 사유의 결과일 뿐이다. 경험적 언어로서 파롤-즉 이미 확립된 기호를 적절히 동원한 파롤-은 진정한 언어의 입장에서 보면 파롤이 아니다.”3) 전통이 그저 나의 규범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그저 도식적인 그림을 보는 것이며, 사물 역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곳에는 개별성도 역사도 생겨나지 않는다. 새로움에 대한 의식의 확충 역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이 하나의 파롤을 위한 선행된 이해의 통로라면 그리고 그것을통해 이해의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면 전통은 우리에게 경험의 풍요로움으로 이끌 것이다. 

 

 차현욱의 작업에서 성급하게 완성된 의미나 체계를 운위하기보다 그가 보이는 운동의 가능성을 보아내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의 산수작업 혹은 수묵작업은 몇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할 다급함이 없지 않지만, 아래위가 비고 좌우가 꽉 찬 구성은 좌우가 움직일 수 있는 막힌 공간이며, 상하는 움직일 수 없는 열린 공간이다. 이처럼 전통적 공간을 역설

적으로 구성하는 감수성은 그가 콜라주와 몽타주를 바탕의 비정형 요철을 통해 산수화 기법의 해체를 얻으려 하듯 그의 산수화 작업은 산수의 포치가 주는 자연스러운 구성력을 해체의 특성으로 보아내는데 있다. 기존언어를 그의 언어로 해체하고 재구성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경험을, 잠재된 언어들의 충격을 목격하게 된다.

​미술비평가 강선학

 

 

 

 

1) 메를로 퐁티, 김화자 옮김,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책세상, 2005. p.26

2) 자크 랑시에르, 김성운 옮김,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하, 2014. p.222

3) 메를로 퐁티, 앞의 책. p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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