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성의 공간: SF와 산수의 결합, 차현욱 작가_김남수(안무비평)_2018
#1.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기둥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거대한 회오리바람 같은 깔대기 모양입니다. 구름들 속으로 쑥 들어가버리려 하는군요. 아, 이건 말로 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막 커다란 감정의 물결이 제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기쁨이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아서 클라크, <유년기의 끝> 중에서)
#2. “근접한 탈인간적 세계는 패턴으로 표현된다. 이 패턴들은 대부분 장미, 연, 쥐꼬리망초, 종려, 파피루스 등의 잎과 꽃으로부터 추상화되고 순환과 변형을 통해 정교화되어 ‘다른 세계’의 살아있는 기하도형을 연상케 하는 수송력 있는 무엇이 된다.” (올더스 헉슬리, <지각의 문> 중에서)
SF 산수[⼭⽔]라는 세계
아서 클라크의 SF 고전 <유년기의 끝>은 지구 최후의 광경을 유일한 증인이 자신의 목격담을 남긴다. 이 목격담은 “이제 모든 역사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라는 구절과 함께 진행된다. 그 ‘절정’은 지구 내부의 빛이 밝혀져 오고, 외계의 천체가 지구 상공으로 들어오는 두 가지 방향을 포괄한다. 마치 내부와 외부가 상응하는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진행된다.
차현욱 작가의 회화는 바로 그 아서 클라크 스타일의 SF가 산수와 어우러지고 있어서 굉장히 묵시록적인 동시에 그로테스크하다. 이 기묘한 만남은 산수화라는 장르의 관습을 창조적으로 배반하게 하면서 “규준을 넘어 본능과 두뇌로 만들어내는” 스케일을 중시한다. 그 스케일은 무한을 염탐한다. 가령, 1600년 교황청 종교재판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철학자 조르다노 부르노의 무한한 우주와도 흡사하다. 태양신과 별들이 압도적인 밤하늘의 천구를 찢고 그 바깥으로 자유롭게 머리를 내미는 부르노의 초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그는 화형당했듯이 차현욱 작가는 ‘다른 세계’로 머리를 내미는 것이다.
차현욱 작가는 회화라는 ‘유년기’가 끝나가는 지점에서 회화의 우주성을 대담하면서도 발랄하게 표현한다. 그는 대범한 듯 말수 적게 그러나 실존적으로 이 가상의 산수 풍경이 우주적 실재가 되는, 혹은 되게 하려는 욕망 -- “우리는 욕망을 사랑한다.”(피카소) -- 으로 은은하다. 그는 마치 지구의 마지막 날을 순간 응결한 것 같은 이 묵시록적 풍경을 하나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시각예술가의 당연한 임무 수행처럼 받아들인다. 즉 그 압도적인 상상력과 그로테스크한 표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감흥의 세계로 이끌어들인다. 회화가 영화라는 매체보다 훨씬 더 오래된, 아니 태고적 기원을 갖는 매체지만, 차현욱 작가에게 이 ‘SF 산수’는 2차원 평면이 홀로그램처럼 보다 고차원의 세계를 열어버린다. 어떻게 해서 이런 즐겁게 경악할 만한 일이 가능한가. 왜 작가는 이런 대규모의 스케일에 고차원의 세계를 비벼 익히는 회화 작업을 하고 있을까.
“예전에 대전에 있는 천문대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목성을 볼 수가 있었다. 천문학자 갈릴레오가 봤다는 목성이라는 거대 행성과 목성의 위성 4개를 난생 처음 봤다. 천체망원경으로 행성을 본 것인데 생각보다 , 상상도 못한 느낌을 줘서 깜짝 놀랐다. 진짜 새까맣고 아무 소리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목성이랑 위성 4개가 너무 적막하고 너무 고요하고 너무 쓸쓸할 것 같은데 외롭지는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줬다. 어둠 속의 천체들을 보면서 나는 왜 유년기의 생활이 생각났었냐 하면, 어머니가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과학앨범을 사줬었다. 얇은 두께에 사진 많은 도록인데, 식물이랑 곤충이랑 우주가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이 천체 파트였다.” (차현욱 작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원체험은 부모의 알 수 없는 행위로부터 받는 강렬함이 그 기원인데, 그것이 나중에 사후해석과 재구성에 의해 이성적 앎의 영역으로 넘어가지만 무엇인가 계속 잔여물을 생산하게 된다. 차현욱 작가는 이 “기쁨이나 슬픔”은 아닌 원체험이 풍요로운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경우다. 그가 추구하는 밤의 산수 안으로 천체들이 들어오고 있는 찰나지간의 응결은 자신이 가장 그리워하고 순수했던 유년기의 리비도 에너지와 연관되어 있다. 확장되는 기억, 천체로 대표되는 우주적 상상력, 동양화 전통으로부터 이질적인 공간 등등 차현욱 작가는 ‘SF 산수’의 밑돌들을 깔고 있었다.
한편, 갈릴레오 시기만 해도 부르노처럼 화형당할 각오를 하고, 미신적인 종교와 움트는 과학 사이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천문학자 갈릴레오 자체도 남다른 욕망이 있었다. “나는 우주에서 신의 얼굴을 찾는다.” 라는 것이다. 그 ‘신의 얼굴’은 시간적 차원을 하고 있었다. 이 싱글채널의 시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신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차현욱 작가의 회화는 이처럼 ‘신의 얼굴’이라는 타블로[tableau] 감각이 강하다.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연금술적 결합을 이뤄내는 생명(=혹은 생명절멸)의 압축 시공간.
시간의 얼굴들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기둥이 치솟고 마치 천동설의 우주가 천천히 돌고 있는 듯한 형상이 있는 그림(들)은 이미 멜랑콜리하게 보인다. 드로잉 작업을 선행하지 않고, 전통적인 동양화의 기법으로 번짐 효과를 보다 유니크하게 사용하는 차현욱 작가는 이 멜랑콜리한 SF의 형국에 대해 1) 지구 최후라는 묵시록적 재앙으로 못박을 수 없음을 밝힌다. 그가 천체망원경으로 목도한 것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너무 당연하게 “여기 있는 (보이지 않는) 천체들”의 존재감이었다. 2)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천체들의 그로테스크함. 여기서 ‘그로테스크’는 아연 활기를 띠는 미하일 바흐친의 용어로서 두 가지 시간들이 범벅되어 있는, “시간의 얼굴들”이 ‘안짝과 바깥짝’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개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 상공으로 천체들이 진입하는 광경은 우주적 축제가 벌어지는 현장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마치 선정[禪靜]에 든 것처럼 평상심의 거처이기도 하다.
한지에 물을 곱게 뿌리고 그 머금은 지질 위에 마른 붓으로 골법처럼 흔적을 남기고 번지게 하는 수법이 마치 수묵으로 표현한 SF처럼 지구 상공을 압도하는 스펙터클인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인 지구인의 현실 저 너머에서 여전히 섬광의 보이지 않는 빛을 번쩍이고 있는 비가시적인 비전의 세계를 두드러지게 한다. 그러니까 차현욱 작가의 회화에서 “시간의 얼굴들”은 영화 <멜랑콜리아>처럼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천체의 시간이라는 측면이 있으며, 동시에 작가의 유년기라는 지나가버린 황금의 시절로부터 소환되어 되돌아오는 기억의 시간이라는 측면이 있다. 각각 “시간의 얼굴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일방향적 시간 흐름을 탈선시킨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뒤섞는다. “미래를 가는 것이 과거로 가는 것이다.”(시인 이상)
천체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멀리 압도하는 , 히말라야 산맥이 비현실적인 스케일로 버티고 있는 그림 앞에 선 인물은 이 역설적인 “시간의 얼굴들”을 마주하는 유일한 증인이자 체험자이다. 다름아닌 작가 자신의 아바타에 해당하는, ‘역사의 절정’에 비춰서 대단히 보잘 것 없으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으로 영웅적인 이 존재자는 무한으로 증식하고 번짐 효과를 타고 흐르는 이 세계를 삼각형의 그림자로 감당해낸다. 칸딘스키에 의하면, 이 삼각형은 ‘정신의 삼각형’이며 그 밑변이 상승하면서 대중과의 접촉면은 점점 줄어들고, 가장 위에 있는 꼭지점은 다름아닌 ‘정신의 한 인간’이 있는 ‘오늘’이다. ‘오늘’은 과거 현재 미래가 시간농축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그림자에 그림자를 가늠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 서서 존재자의 눈은 천체들이 가득한 하늘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음 자체를 느끼고, 그의 지성으로는 끊임없이 공간에 공간을, 산수에 산수를, 천체의 세계에 천체의 세계를 추적하도록 한다. “시간의 얼굴들”은 삶의 심연, 성립불가능, 역사의 종말 이후의 공중들린 삶의 형식을 암시한다. 헤겔이 예언한 역사의 종말 이후를 살면서 우리의 좌표계는 흔들린다. 칸트가 진선미를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장 완벽하게 분리시켜 놓았지만, 헤겔은 그 분리를 재통합시키는 흐름을 직선적 시간, 묵시록이 예비된 시간관 안으로 안내한다. 진선미 미분리의 동양은 미신적이고, 진선미 분리의 서구는 끝났다. 포스트모던은 이 미신과 종말 사이에서 신성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차현욱 작가의 회화는 이 종말 이후의 이정표에는 신성성이 필요하다는 사실, “누구나 자신 안에는 신과 신전이 있다”(백남준)는 사실을 일깨운다. 숭고미라는 개념으로 덧입혀진 레토릭은 차현욱 작가에게 “상상인 것 같은 것이 실재라면 어찌할 것인가” 라는 현실이다. 쏟아지는 천체들이 압도적으로 리얼한 것이다.
밤의 풍경, 밤의 기호
차현욱 작가가 “시간의 얼굴들”이 들이미는 SF의 장면 연출이 있는 회화의 밑변은 산수[⼭⽔]이다. 그는 산수로서 밤의 풍경을 그리며, 그가 낮에 본 일상의 도시 경관 저 낮은 곳에 도사린 작고 비루한 정원 안의 식물과 그 식물의 그림자를 주목한다. 그는 이것을 ‘어두운 별빛 아래 피어나는 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별빛이라는 미소한 광원에 비치는 꽃, 즉 “우주 전체를 갈무리한 꽃우주”라는 것이다. ‘꽃우주’는 차현욱 작가가 대구라는 이 실존적인 도시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면서 유년기와의 접속, 그리움과 순수함의 정념 같은 힘에 의해 도출해낸 세계이다. ‘꽃우주’는 아무리 낡고 후미진 도시 변두리 빌라촌이라고 해도 밤의 입자가 깔리고, 모든 것이 이 밤의 입자에 물들어서 더욱 어두운 가운데 돌연 빛의 섬광 같은 깊이의 세계이다.
짙은 어둠이라는 조건은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생체 내부로서의 발광 현상을 유발한다. 동굴벽화로부터 동시대 뇌과학에 이르는 이 ‘내부섬광’[entoptic]의 기호는 별빛 아래 피어나는 꽃들이 보인다는 차현욱 작가처럼 미세지각 속에서 시각적 명증함과 이성을 흔들고 유체와 공명의 감각으로 동세의 무늬를 출현한다. 동세, 즉 움직이는 기세의 문양들, 세력들. 동세가 열어가는 이성 너머의 새로운 공간, 초이성의 영역. 차현욱 작가가 그리는 밤의 산수[⼭⽔]는 작가 자신이 낮에 “손과 냄새로 그것을 느끼고”, “가슴과 머리로 기억”한 지각의 소산인 동시에 “어둠 속의 풍경들을 상상”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 지각과 상상력의 작업에는 시지각적이면서 음향적인 이미지, 섬광의 기호가 반드시 개입한다. 차현욱 작가가 “면처럼 보이는 두꺼운 선”이라고 자신의 붓의 특징을 지칭할 때, 그 선의 패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림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빛의 패턴 내부섬광의 무늬로 꿈틀대는 , , 일종의 꿈을 구성하는 물질처럼, 혹은 인간이 다른 유기체로 변신할 수 있는 전-개체적 단계로서의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처럼 심상치 않는 기척, 징후, 예감으로 움직거린다. 회화 속에서 이 기호들은 움직이고 꿈틀댄다. 이 미세한 패턴, 두꺼운 무늬들은 차현욱 작가가 산수[⼭⽔] 개념에 가한 혁신이 무엇인가를 웅변한다. 그것은 산수라는 외적 혹은 내적 풍경화에 대해 인간 신체 내부에서 발광[發光] 하는 풍경화가 추상기호 타입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여실하게 나타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차현욱 작가는 기본적으로 밤의 풍경을 산수[⼭⽔]로 그린다. 이 밤의 풍경을 이성을 초월하면서 가리켜 스스로 ‘어두운 밤 별빛 아래 피어난 꽃’이라는 시적 허용으로 적는다. 밤풍경은 현재의 세계 전체가 빛오염에 심각해진 상태 이전의 그 어느 시간대로부터 전송되어 온다고 봐야 한다. 이는 차현욱 작가가 그리워하고 잃어버린 순수함을 지향하는 유년기와 접속되어 있다. 이러한 실존적 정념은 지금처럼 포스트모던의 종말과 그 이후 좌표설정에 실패한 미술의 흐트러진 패러다임에서 매우 중요한 힘을 구성한다. 확실히 차현욱 작가가 그리는 밤의 풍경에는 구체성과 추상성이 교차하는, 더 정확하게는 구체성의 형상이 마치 환영이나 미확인 오브제, 혹은 착각의 유체로 흘러가면서 돌연히 추상적 기호들이 출현하는 경향이 있다. “면처럼 보이는 두꺼운 선”이라는 1차원의 획이지만, 이 두께감각 때문에 추상적 기호들은 풍경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 부분에서 일차적으로 출현하기도 하고 이차적으로 기호들끼리 결합되기도 한다. 이 출현과 결합 모두 ‘생각의 물질’이자 ‘비물질’이다. 그 도해이다. 어떻게 도해하는가. 또는 어떻게 도해해야만 하는가.
창세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아직 모든 것이 미분화 상태일 때,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모를 어둠은 밤의 권능만은 아니었다. 그 어둠은 특별히 ‘흑암’이라고 했는데, 이 깊이 모를 어둠 위에 신성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운은 보통 비둘기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장면의 ‘흑암’과의 관계에 대해 작가들은 두 가지 태도를 취했다. 하나는 그 ‘흑암’의 깊이 속으로 비둘기가 수직으로 다이빙해서 ‘들어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흑암’의 수면에 날개를 드리운 비둘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뉘앙스를 뺀다면, 이 ‘흑암’과의 관계설정이 차현욱 작가에게는 무척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비둘기는 신성성의 빛이다. 빛이 깊은 어둠 위에 드리워지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차현욱 작가는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 방식으로 이 별빛, 가냘픈 빛, 꽃을 피어나게 하는 별빛을 작가 자신의 내부의 빛과 연동시킨다. 캔버스의 저 지구 상공 속으로 들어오는 천체의 빛은 거대하지만, 그 묵시록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현장에 최후의 증인처럼 우뚝 선 존재자는 그보다 더 은은하고 거대한 내부의 빛을 상응시킨다. 소위 ‘SF 산수’는 이처럼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이 서로 동기화하는 회화의 세계로 보인다. 차현욱 작가는 재현하는 회화 너머에서 서로 동기화하는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회화를 재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회화의 퍼스펙티브가 유년기의 새로운 시작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